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75

작성일 2006-08-03 첨부파일

 
벽지에 벽을 붙이기 - 공막돌륭술


▲ 이성진 교수    
 눈 속에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 망막이 찢어지고(망막열공, retinal tear) 그곳을 통해 눈 속에 있던 물이 스며들어가서 벽지(망막)가 벽에서부터 떨어지게 되면(망막박리, retinal detachment) 그 부분은 볼 수 없게 됩니다. 이 때 찢어진 구멍을 메우고 벽지를 다시 벽에 붙여주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질환이 매년 인구 일만 명 당 한 명 정도 발생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인구를 4천5백만 명이라고 보면 매년 4천5백 건의 망막박리가 생기는 셈입니다. 절대 만만하게 생각할 수 없는 병이지요.
 
 망막박리 수술을 처음 접했던 전공의 시절에 느꼈던 이 수술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 같은 첨단 과학시대에 어쩌면 이렇게 무식한(?) 수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른 안과 선생님도 이 수술에 대해 처음 알게 되면 코를 다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무식하고도 원시적인 수술이 무엇이냐면 바로 지난번에 ‘큰 망막의사 스케이펜스(schepens)’를 소개하면서 그가 창안했다고 말씀드린 공막돌륭술(scleral buckling)입니다. 
 그런데 이 수술법의 이름이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돌륭(突隆)’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갑자기 돌(突)’자와 ‘높일 륭(隆)’자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륭술(buckling)’을 영문의학사전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망막박리가 있을 때 눈의 바깥 껍질(공막, sclera)을 눌러서 눈의 크기를 줄여주어 망막을 벽에 가깝게 해 주는 수술’(an operation for retinal detachment which reduces the size of the globe by indenting the sclera so that it approximates the retina)이라구요. 도대체 ‘돌(突)’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병아리 전공의 시절에 선배님께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버클(buckle)이 그 버클입니까? 허리띠를 죄어 고정시키는 장치가 되어 있는 버클 말이에요. 그랬더니 ‘맞아. 그 버클이야.’ 하시는 겁니다. 설마 돌륭술(buckling)이 눈에 허리띠 같은 것을 두른 후 그것을 조여 고정시키거나 또는 불룩 튀어나온 버클과 같은 조각을 눈에 붙여 눈을 지속적으로 눌러주도록 해 주는 수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흠...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그런 의미입니다. 신성한 눈에 버클이나 허리띠를 감아 조이는 고문을 가하다니 원시적이고 무식하단 소리를 들어도 쌉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떨어진 망막을 벽에 붙이는 방법에 있었습니다. 
  
 장마기간에 벽과 벽지 사이로 스며든 물에 의해 벽지가 떨어진 이웃집을 돕기 위해 도배에 관한한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였습니다. 물론 방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이며, 어떻게든 집 바깥에서 벽지를 붙여야 합니다.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될까요? 아마 먼저 창문을 통해 어떤 벽에 벽지가 떨어졌는지, 떨어진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벽지 뒤에 고인 물을 제거해야 하겠지요? 방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벽을 뚫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물이 얕게 고인 곳을 무턱대고 뚫다가는 벽이 뚫릴 때 드릴이 벽지를 찢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불룩하게 떨어진 벽지가 있는 방향으로 드릴을 넣어야 합니다. 완전히 물을 다 뺄 수는 없겠지만 많이 빼고 나면 벽지가 조금 벽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벽에 벽지를 어떻게 붙여야 할지 망막한 것입니다. 벽지가 벽에 붙을 때 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군요.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꼭 벽에 벽지를 붙여야 한다면 벽을 밀어서 벽지에 붙입시다.’
 정신을 차린 기술자들은 그 말에 따라 벽에 띠를 두른 후 조심스럽게 띠를 조이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벽을 안쪽으로 불룩하게 눌러 결국 벽지를 붙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공막돌륭술의 비밀이었습니다. ‘벽지를 벽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벽지에 벽을 붙이는 것’ 말입니다. 수술 성공률이 40%를 밑돌다가 90%로 상승하게 된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빠, 그런데 아까 ‘돌(突)’자의 비밀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지혜가 묻는군요. 그래서 이 ‘갑자기 돌(突)’자가 혹시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옥편을 같이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돌’자가 매우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멍(穴, 혈)과 개(犬, 견)로 이루어진 이 말은 ‘개가 구멍에서 뛰어 나온다’는 뜻으로 ‘굴러서 힘차게 내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군요. 거기에 파생되어 ‘갑자기’, ‘갑작스럽다’, ‘내밀다’. ‘쑥 나오다’. ‘부딪치다’, ‘구멍을 파서 뚫다’, ‘굴뚝’, ‘대머리’, ‘사나운 말’ 등의 또 다른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돌(突)자’가 불룩하게 ‘내밀다’라는 뜻일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지고 있었는데 자꾸 ‘구멍을 파서 뚫다’라는 그럴듯한 뜻에 눈이 갑니다. 사실 구멍을 뚫어서 물을 빼는 것도 중요한 수술의 한 과정이며, ‘높일 륭(隆)’자가 뒤에 받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이 수술이 눈을 누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까 ‘내밀다’로 말해야지 하고 있는데 지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갑자기 돌’자가 맞는 것 같아요. 아빠가 가끔 ‘갑자기’ 밤에 수술하시고 늦게 집에 오시는 수술이잖아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죠. 그런데 지혜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하다면 ‘갑자기’ 벽을 밀어서라도 벽지에 붙여야 해요. 맞지요?” 
  모르긴 해도 ‘돌륭술’은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쓴 것일 겁니다. 제 생각은 ‘공막 돌륭술’ 대신에 ‘공막 누르기’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답 대신에 아빠를 이해하고 있는 지혜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벽을 허물고라도 같이 꼭 붙어있고 싶은 벽지와 같은 제 딸을 말입니다.